'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일본 나가사키 — 나가사키 시의 높은 곳에서 1931년 이곳에 수도원을 창설한 성 막시밀리안 콜베(St. Maximilian Kolbe)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이 울창한 산악 지역은 루르드를 연상시키는 동굴로 유명하다. 이곳은 폴란드 프란치스코회 성인이 복되신 어머니께 경의를 표하고 폴란드로 복귀 명령을 받을 때까지 5년 동안 지냈던 곳을 성결케 하기 위해 만든 동굴이다. 일본어
나가사키라고 하면 미국인들은 1945년 8월 9일 미국 B-29가 투하한 원자폭탄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가사키 지역이란 천주교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1600년대 중반, 선교사들은 일본 남부의 여러 항구에서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급속하게 성장하는 나가사키의 기독교 공동체를 보며 당시 상인들은 나가사키를 “작은 로마”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나가사키를 방문하면 잔인하고 신비로우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살아있는 일본의 가톨릭 역사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또한 계속되는 순교의 비극적인 역사이기도 하다.|JAPANESE|
새로운 영혼과 새로운 순교자
항로를 이탈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 열도의 남단에 표류하면서 호전적인 군벌들이 난립하던 아름다운 땅을 ‘발견’했다. 군벌들은 외국이 배에 싣고 온 총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수회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일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비에르는 일본에 2년(1549-51) 동안 머물며 1,000명에 가까운 영혼을 기독교로 인도했다. 그 후로도 30년에 걸쳐 약 20만 명의 일본인이 개종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바오로 미키(Paul Miki)였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가문으로 일본 남부를 휩쓸다시피 하던 신흥 종교인 가톨릭을 받아들인 집안에서 자란 미키는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았다. 민정 기관의 박해가 점점 잔혹해지자 미키는 일본 최초로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유럽인들이 교회를 통해 일본을 정복할 것을 두려워한 황실 정부는 1587년에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 교회로 숨어들었다.
나가사키는 기독교 영주가 통제하는 국제 무역의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주요 가톨릭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기독교 영주는 항만세를 사용하여 예수회가 학교, 가난한 집, 교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다가 보물과 성직자를 싣고 출항한 스페인 국적의 갤리온선이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독재하던 막부가 격분했다. 장관은 경비대를 시켜 한겨울에 가톨릭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모아 한 달에 걸쳐 막부의 수도 격인 교토까지 행진하도록 한 후 공개 처형했다. 끔찍한 광경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개종을 막고자 했던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일본 예수회의 교리 문답사 3명도 막부의 무사들에게 끌려 갔는데 여기는 33세의 미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프란치스코회의 외국 선교사 6명과 17명의 평신도도 함께 끌려갔다. 그중 3명은 복사를 맡아보고 있는 소년들도 있었다. 설교의 은사를 받은 미키는 귓볼이 잘려 나가는 등 신체가 절단되고, 고문당하며, 굶주리고, 조롱당하는 동안에도 비아 돌로로사의 정신을 따라 복음을 선포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죄인들과 소년들은 언덕으로 끌려 올라갔다. 거기에는 이미 26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순교자들은 밧줄과 쇠집게로 십자가 위로 올려졌다. 죽창으로 온몸이 찔려 고통스러운 처형의 순간까지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했다.
미키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에게 임하신 성령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처형은 실패했습니다. 그러한 처형도 신앙을 말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가사키의26 순교자 박물관관장이자 예수회 신부인 렌조 데 루카(Renzo de Luca)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목도한 광경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로 인해 헌신이 깊어졌습니다.”
신자들은 피로 물든 수건과 같이 순교자의 유품을 모아 간직했다. 이러한 유품은 교황 비오 9세가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시성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62년에 설립한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숨은 기독교인
처형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신자들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당국은 더욱 개별적인 접근 방식을 시도했다. 특히 1614년에 기독교가 완전히 금지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기독교인에 대한 정보에도 현상금이 걸렸다. 엔도 슈사쿠의 역사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의 영화 침묵(Silence)에 반영된 바와 같이 성직자의 수급에는 더욱 높은 현상금이 붙었다. 모든 가정은 반드시 불교 사원에 등록하도록 강요했다
은밀하게 독실한 신앙을 지키는지 시험해 위해 사람들에게 예수나 마리아의 형상을 밟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에후미(efumi-e)는 아름다운 청동상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많은 사람의 발에 밟혀 표면이 반들반들해졌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에서는 1629년부터 1856년까지 이러한 시험을 매년 시행했다
종종 자신의 헌신으로 인해 적발된 가톨릭 신자들이 체포될 때 받는 고문은 극에 달했다. 산채로 온천에 삶거나 말뚝에 묶은 채 천천히 익사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멍석에 말아 불에 태우거나 배설물 통에 거꾸로 처박기도 했다. 기독교에 대한 처형은 1805년에야 취소되었다.
억압은 신앙을 지하로 몰아갔다. 예를 들어 가톨릭 이미지와 성례전은 눈에 띄지 않는 곳이나 벽에 숨겼다. 자비로운 관음(Kannon)이라는 소형 흰색 불교 조각상은 비밀리에 숭배하는 마리아 관음(Maria Kannon)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숭배했다.
숨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카쿠레 키리시탄(Kakure Kirishitan)은 사제가 없이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전수했다. 세례는 유일한 정규 성찬이었다.
연간 약 50,000명의 방문객이 순교자 박물관을 방문하며, 한국에서 오는 순례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드 루카 신부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의 각 주교회의는 이러한 방문을 장려함으로써 이해를 증진하기로 상호 약속했다.
콜베와 무겐자이 노 소노
성 막시밀리안 콜베의 손길이 닿은 곳을 방문하는 폴란드 가톨릭 신자들도 있다.
놀랍게도 1930년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수도원 프란치스코회 신부인 콜베는 이미 국내 최초의 가톨릭 잡지인 죄 없는 마리아 기사(현지 번역으로는 죄 없는 마리아의 기사)의 일본어판을 인쇄하고 있었다.
처음에 콜베는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Oura Cathedral) 근처에 머물렀다. 오우라 천주당은 일본이 해외 무역을 재개하면서 그 규모가 커지는 외국 상인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세운 곳이었다.
콜베 신부는 숨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특별한 관계에 감동을 받았다. 오우라의 봉헌 직후 베르나르 프티장(Bernard Petitjean) 신부에게 250년 이상 신앙을 지켜온 우라카미 지역의 신자들이 단체로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알아본 농부, 어부, 장인, 여성들이었다. 찾아온 그들은 같은 신앙을 공유한다는 증거로 마리아상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공동체의 건설자로서 콜베 신부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바로 내가 걸었던 나가사키 외곽의 산간 언덕에 있는 무겐자이 노 소노(Mugenzai No Sono)에서 그 수도원을 시작했다. 이 외딴곳을 그는 복음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었다. 1831년부터 1836년까지 선교사 수는 5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났다. 잡지 발행 부수는 70,000부로 늘어났다. 이러한 전통은 폴란드와 일본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콜베 신부는 결핵으로 고생했고 종종 아팠다.
성인이 사용한 큰 나무 책상은 수도원의 작은 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명소이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박한 수도실을 방문했을 때 이 책상에 앉았기 때문이다.
일본 현대사 전문가인 조지타운 대학교 교수 케빈 도크(Kevin Doak)는 성인이 일본에서의 경험한 금욕 생활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순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군사 목표물로부터 몇 마일 떨어진 우라카미 지구 바로 위,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가톨릭 성당에서는 세 명의 신부가 고해성사를 듣고 있었다. 성 막시밀리안 성당은 산으로 가려져 원폭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라운드 제로의 성인
원자폭탄 투하 중심지를 기념하는 나가사키의 야외 기념물인 평화 공원 야외 기둥이 외롭게 서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한 때 우라카미 천주당의 일부였던 성스러운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천주당은 마침내 자유를 찾은 숨은 기독교 공동체가 189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건물이다. 이는 재난에 대한 가톨릭 이해의 중심을 의미한다.
폭발로 인해 발생하는 화구(Fire ball)와 열, 방사선으로 즉사한 시민 중 8,500명이 가톨릭 신자였다. 17대 동안 숨어 지내던 기독교 가문의 후예인 나가이 미도리 같은 사람들은 손에 묵주를 들고 산채로 불탔다. 그나마 미도리의 뼈 중 일부만이 구슬과 십자가, 체인과 녹아 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1945년 말까지 거의 모든 민간인인 약 74,000명이 사망하고 75,000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이는 바로 전략적 가치가 모호한 핵 공격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또 다른 나가사키를 막기 위해
“나가사키는 반드시 원자폭탄에 노출된 마지막 장소여야 합니다” 나가사키의 원폭 박물관장인 노세 히로(Hiroshi Nose)는 1955년에 설립된 박물관의 발전상을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는 박물관을 둘러보며 “모든 세계 지도자들이 이 박물관을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박물관은 핵무기의 막대한 파괴적 범위와 그에 따른 인간 생명에 대한 파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문화 단체인 창가학회(Soka Gakkai)의 나가사키 본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2017년 UN 협약인 핵무기 방지 조약(TPNW)의 서명국을 향한 진행 상황을 벽에 도표화한 타임라인을 보았다. 이 조약은 현재 바티칸을 비롯한 70개 국가에서 승인되었다.
이 조약은 1968년의 비확산조약보다 더 강력하지만 현재까지 일본이나 미국 모두 이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 (창가학회와 일본신사 협회는 이번 조약을 의제로 9월 파리에서 열리는 가톨릭 평신도 단체인 산테지디오 주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지역 창가학회 지도자인 미우라 나오타카가 이렇게 말했다. “국가 간의 긴장이 고조될 때도 민간 외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 네트워크를 확장해야 합니다.” 직업을 묻자, 그는 간단히 ‘평화운동가’라고 답했다.
National Catholic Register/INPS Japan
Original Article: https://www.ncregister.com/news/nagasaki-martrydom-atomic-bomb-gaetan
Victor Gaetan Victor Gaetan is a senior correspondent for the National Catholic Register, focusing on international issues. He also writes for Foreign Affairs magazine, The American Spectator and the Washington Examiner. He contributed to Catholic News Service for several years. The Catholic Press Association of North America has given his articles four first place awards, including Individual Excellence, over the last five years. Gaetan received a license (B.A.) in Ottoman and Byzantine Studies from Sorbonne University in Paris, an M.A. from the Fletcher School of International Law and Diplomacy, and a Ph.D. in Ideology in Literature from Tufts University. His book God’s Diplomats: Pope Francis, Vatican Diplomacy, and America’s Armageddon was published by Rowman & Littlefield in July 2021. Visit his website at VictorGaetan.org.